조큐의 난과 싯켄정치

요리토모가 1199년 사망하자 장자인 요리이에()가 장군의 지위를 계승하였으나 유력한 고케닌들을 통제하지 못하였으므로, 막부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 요리토모의 처()인 호조 마사코()의 일가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호조시()는 원래 이즈 지역의 소호족에 불과하였으나, 이곳에 귀양을 온 요리토모와 마사코가 혼인관계를 맺어 점차 세력을 확장하였다. 호조씨는 중신들의 합의제를 통한 정치를 행하였지만 점차 자신의 일족을 막부의 주요직에 앉혀 권력을 독점해갔다. 즉 장군을 보좌하는 '싯켄()'이라는 지위에 앉아 막부의 정치를 장악하였으므로 이를 '싯켄정치'라 한다.

1219년 3대 장군인 사네토모()가 암살을 당하여 겐지의 후사가 끊어지자 호조씨는 교토로부터 후지와라시()와 황족 중 어린 사람을 골라 형식상 장군으로 맞아들여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 무렵 교토에서 원정을 실시하고 있던 고토바() 상황과 조정의 귀족들은 무사의 세력이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어가는 것에 반감을 가졌다. 특히 조정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인 장원을 점차 지토가 침범해오는 데 대해 더욱 위기감을 느껴 막부를, 나아가 그 중심세력인 호조시 토벌을 전국의 무사들에게 명령하였다.

상황의 명령에 따른 무사들은 상황의 호위병과 서국(西 : 교토로부터 서쪽 지역인 지금의 서일본을 말함)의 무사들이었으나, 동일본을 비롯한 대부분의 무사들은 상황의 명령에 불복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호조시의 막부 쪽에 결집하여 조정군을 물리치고 교토를 점령하였다. 이것이 바로 1221년에 일어난 '조큐()의 난'이다. 조큐의 난 후 막부는 고토바 상황을 오키()섬에 귀양을 보내고 조정 측에 속한 귀족과 무사들의 토지 3,000개를 몰수하여 전공을 세운 무사들에게 토지의 관리자인 지토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막부의 세력이 서일본 지역까지 침투하게 되었으며 교토에는 로쿠하라단다이()라는 기관을 두어 조정을 감시하였다.

싯켄이 된 호조야스토키()는 1232년 무가사회의 관습에 근거하여 처음으로 무가의 독자적 법률인 고세이바이시키모쿠( : 혹은 연호를 따서 라고도 함)를 제정하였다. 이것은 고케닌들에게 재판의 기준을 알기 쉽게 제시한 것으로 이후 무사들의 법률의 기본법이 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는 자신의 영지에 살면서 장관(), 혹은 지토가 되어 농민을 지배하였다.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호를 파고 담을 높이 쌓은 저택에 기거하고 활과 기마 등 무예 훈련에 힘을 쏟았다. 이들 무사들은 조상대대로의 토지를 지키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따라서 일족의 장인 소료()의 힘은 절대적이었으며, 토지의 상속은 여자도 포함된 분할상속이 행해졌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당시의 무사들은 대체로 검소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큐의 난과 싯켄정치 (새로운 일본의 이해, 2005. 3. 2., 다락원)

 

'From >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잘못된 표기=올바른 표기  (0) 2016.10.19
변형생성문법  (0) 2015.10.13
페트라르카  (0) 2015.06.20
인클로저 운동  (0) 2015.06.20
비계 설정(scaffolding)  (0) 2015.06.16
Posted by Goldfis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