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르카

From/상식 2015. 6. 20. 11:12

 

페트라르카

[ Francesco Petrarca ]

출생 - 사망 1304 ~ 1374
출생지 토스카나 지방의 아레초
직업 시인
저서 칸초니에레, 아프리카(1338), 나의 비밀

이탈리아의 시인, 인문주의의 선구자. 단테와 마찬가지로 1302년에 피렌체에서 추방된 한 서기의 자식으로서, 토스카나 지방의 아레초에서 태어났다. 이어서 인치자와 피사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후, 12년 일가는 신천지를 구해서 교황청이 놓여진 지 얼마되지 않은 남프랑스의 아비뇽으로 건너가, 근교의 카르판트라에 거처를 정했다. 부친의 의지에 따라서 16년부터 몽페리에로, 이어서 20년부터는 볼로냐로 유학해서 법률을 배웠는데, 26년 부친의 죽음을 계기로 아비뇽으로 돌아오자, 주저없이 염원인 문학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듬해 27년 4월 6일 성금요일, 성 클라라 교회에서 전생애에 걸쳐서 시적 영감의 원천이 된 여성 라우라를 보고, 결정적인 사랑에 빠졌는데 사랑의 빛과 어둠을 노래하는 『칸초니에레』의 서정시인이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30년경 경제적 이유에서 성직에 오른 시인은 얼마 후에 <로마의 명문 귀족의 자식으로 추기경인 죠반니 코로나를 섬겼다. 이 관계는 47년까지 유지되는데, 유력자의 이해깊은 비호하에, 사절의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문학생활의 자유를 중시하는 일관된 그의 삶의 방식은 여기에서 정해졌다. 33년 벨기에 등을 여행했을때 키케로의 연설문을 발견하여 인문주의자로서의 제일보를 내디뎠는데, 시인 자신이 강조하듯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도 같은 시기에 입수한 것은 그리스도교와 고대 문화의 조화·통일을 지향한 그의 인문주의에 상징적이다. 37년 아비뇽 교외 보크류즈의 계곡에 자유와 고독의 땅을 얻고, 이듬해 야심작 『아프리카』(미완)의 집필에 착수했다.
이 라틴어 서사시의 성공은 41년 로마의 캄피드리오의 언덕에서 시인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고, 현재는 고대 문화부흥의 입역자로서 페트라르카의 이름은 서구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시인의 내면의 갈등은 오히려 심각한 위기를 맞이해서, 아우구스티누스와의 대화의 형식을 취하는 유명한 『비밀』에서는 사랑과 명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가차없는 자기검토가 이루어졌다. 같은 무렵, 로마개혁의 큰 뜻을 품은 콜라 디 리엔초와 친교를 맺고, 47년 코라가 귀족정치를 타도하고 고대 공화정의 부활을 도모하자 열렬히 지지했는데, 개혁은 허무하게 실패했다. 이듬해 48년 유럽 전역을 습격한 흑사병으로 라우라가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또한 이때의 피렌체의 참상을 배경으로 이야기된 것이 『데카메론』인데, 그 작가 보카치오와는 50년에 처음으로 조국의 땅을 밟았을 때 만나서 깊은 우정을 맺고, 이후 가끔 방문했다. 53년 신교황과의 불화를 계기로 프로방스를 떠나서 이탈리아로 돌아올 결의를 하고, 보카치오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라노의 전제군주 비스콘티가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후 흑사병을 피해서 61년 파도바로 옮기고, 이듬해 베네치아로 거처를 정했는데, 어떤 경우에도 기본적으로는 보클뤼즈의 연장이었다. 그리고 70년에 옮긴 파도바 근교의 알쿠아가 마지막 땅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한국사전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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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ld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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